시흥시 목감동 서해안고속도로 목감IC 인근의 한 재활용업체.‘폐신문지를 구할 수 있느냐’는 말에 직원의 안내로 들어선 야적장 한 쪽에는 수 십개의 서류뭉치와 마대자루들이 뒤섞여 나뒹굴고 있었다.
서류뭉치와 마대자루안에는 유명정수기 업체인 W사의 고객관리카드와 S생명보험주식회사의 보험료 납입증명서 등 개인 실명과 휴대전화번호,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가 가득했다.
앞서 화성시의 한 파지수집장에서는 A시 기초생활보장수급자 50여명의 명단과 개인신상정보, SC제일은행·하나은행·농협 등 금융기관의 거래정보조회표 등 개인과 기업의 각종 정보가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이처럼 개인정보가 담긴 민간과 공공기관의 각종 문서가 폐기 과정의 관리소홀로 방치되면서 대규모 정보유출이 우려되고 있다. 따라서 1차 수집처리를 독점하다시피하는 재향군인회의 안일한 폐기문서 처리과정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 허술한 문서 폐기 과정
경기도청은 매년 10~11월 사이 보존연한이 지난 문서의 폐기 작업을 수행하며 한 해 동안 각 부서에서 쏟아지는 폐기문서의 양은 100t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또는 이 가운데 기록물평가심의회 심사를 통해 폐기대상 문서를 선정, 11월께 재향군인회에 폐기문서 처리를 의뢰한다. 그러나 100t이 넘는 처리 물량에 대한 전수검사가 현실적으로 어려워 대부분 감사를 대비한 요식행위에 그치고 있다.
전직 재활용업체 직원 A씨는 “하루에 몇 탕씩 뛰는 수거차량을 담당 공무원이 일일이 쫓아 다니기란 거의 불가능해 즉시처리 여부는 물론 정확한 무게도 알기 어렵다”며 “재향군인회가 수거 총량을 터무니없이 깎아서 보고하지만 어느 공무원도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도청 관계자는 “ 폐기기록 수집처리 대행기관으로 지정돼 신뢰도가 높은 재향군인회에 계속해서 위탁을 맡기고 있다”며 “가능한 한 모든 처리과정을 담당 직원이 확인하고 있어 유출 우려는 없다”고 말했다.
● 비영리단체 재향군인회의 폭리
재향군인회는 지난 군사정권 시설부터 거의 모든 공공기관의 폐지 수거권을 독점해 왔고 지자체별로 폐기문서 처리가 자율화된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재향군인회 경기도지부의 경우 각각 성남(동부)·수원(남부)·의정부(북부)사업소를 두고 폐기문서를 거의 독점하고 있다.
수원사업소의 경우 지난해 도청 폐기문서를 ㎏당 평균 100원에 수거한 뒤 최대 190원을 받고 업체에 넘기고 있으며 일부 물량은 장기간 적치시켜 놓고 직접 재분류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류뭉치를 재질별로 재분류할 경우 분류 전 ㎏당 190원인 복사용지가 ㎏당 300원으로 값이 뛰기 때문이다. 결국 수거량을 허위보고해 한 차례 이득을 취한 뒤 재분류를 통해 2중으로 폭리를 취한 셈이다.
이에 대해 재향군인회 한 관계자는 “관공서에서 수거한 폐지 총량을 조작하는 일은 이 업계에서 비일비재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종이를 분리하지 않으면 질 좋은 재활용지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재분류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문서 폐기과정에서 부작용이 속출하자 일부 지자체들은 문서폐기 전문업체에 폐기문서 처리를 위탁하는 추세다. 소량의 폐기문서는 직접 소형 파쇄기를 통해 수시로 처리하고 대량일 경우 전문 폐기업체를 불러 공무원 입회 하에 전량 파쇄하는 것이다.
실제 지난해 고양시를 비롯, 파주시, 시흥시, 안산시 등이 이같은 현장파쇄 방식을 도입해 폐기문서를 처리했다. 고양시의 한 관계자는 “재향군인회를 통해 처리할 경우 개인정보 유출 등 위험요소가 커 현장파쇄 방식을 도입했다”며 “처리 시간이 길고 비용이 더 들지만 현장에서 직접 감독할 수 있어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허술한 법규정 손질 필요”
보존연한이 지난 공공기관의 기록물들이 대부분 외부업체를 통해 폐기돼 정보유출의 위험이 크지만 관련 법규정은 미비해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18일 경기도에 따르면 지난 1999년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 지난해 국가기록원은 공공기록물 관리 전반에 관한 권고안을 담은 법령 해설집과 표준을 각 공공기관에 배포했다.법령집과 표준은 각각 관공서의 기록물을 외부에서 폐기해야 할 경우와 외부업체에 폐기를 위임할 경우 기록물이 완전 소멸될 때까지 담당 공무원이 처리과정에 입회·감독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상위법상 폐기록문에 대한 구체적인 처리방법이나 기준이 모호하고 법령집과 표준은 권고안 수준에 그치면서 폐기록물 처리에 대한 책임이나 관리 감독이 형식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도 단위 행정기관을 비롯해 법원, 검찰, 농협 등 수많은 공공기관의 직원들이 폐기과정을 감독하지 않아도 이를 제지할 법적 근거는 없는 상태다.
한 폐지수거업체 관계자는 “폐기량이 많으면 보통 2~3일에 걸쳐 차량수거 작업이 이뤄지는데 공무원이 전과정을 확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마지막 차량분에 한해 업체까지 동행, 일부 물량의 처리과정만 촬영하고 돌아가기 일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폐기록문 처리 위탁업체가 이처럼 허술한 관리체계를 악용, 수거량을 입맛대로 줄여도 공무원들이 이를 확인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도청 관계자는 “보안업무 법규집에 근거해 폐기과정을 꼼꼼히 확인하지만 한정된 인력으로 사실상 전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관련 법을 개정해 구체적인 처리 기준이나 절차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기일보 2008-6-19] 이학성기자 hslee@kgib.co.kr